그는 나라의 반석이며 국민들의 진정한 어머니였다. 사치하고 멋 부리지도 않았다. 일편단심 오직 국가의 안위와 국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고달프게 살다가 비명에 우리 곁을 떠나가게 되었다.
국민들은 땅을 치고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으로 목 놓아 울부짖었다.
하늘마저 슬퍼하니 산천초목도 고개를 숙여 돌아올 수 없는 영겁의 길로 보내 드렸지만, 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육영수 여사를 잊지 못해 그리워하고 있다.
1968년 7월 3일 밤이었다. 폭우로 인해 물난리가 났다. 잠원동 주민 300여 명이 신동초등학교에 긴급히 대피해 있었다. 그때 한사람이 폭풍우를 뚫고 황토물 교정을 철벅철벅 걸어오고 있었다. "이 밤중에 누구일까?" 그는 교사 안으로 들어오며 머리를 감쌌던 흠뻑 젖은 수건을 벗었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사님이 아니냐?" 누군가 놀라 소리쳤다. 육영수 여사는 "여러분 얼마나 고 생이 많으세요?" 라고 인사를 한 뒤 가져온 구호품을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나룻배를 타고 발목이 빠지고 무릎까지 잠기는 흙탕 물길 속을 고무신 차림으로 걸어서 그곳까지 온 것이다.
그 해 호남은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었다. 현장을 찾은 육영수 여사는 논두렁 길로 걸어갔다. 말라 타버린 논 구석에 양수기가 있었다. 올라서서 양수기를 밟기 시작했지만, 흙먼지가 뒤덮인 빈 양수기가 쩍쩍 소리만 냈다. 그녀를 발견한 동네 사람들이 다가갔다. 육 여사는 울먹이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육 여사는 살아생전에 소리소문없이 봉사와 선행에 힘썼다. 보육원, 양로원 등 사회의 그늘진 곳을 보살폈다. 1967년 말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정부, 여당 송년회에 육 여사가 불참했다. 의아해하는 참석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은"우리 집사람은 보육원에 가느라 못 왔다."고 실토하는 바람에 모두 아무 말을 못하고 민망해했다.
육 여사가 만든 사회봉사단체 ‘양지회’는 전국 87개 나환자촌의 대명사였다. 그는 한센인들을 찾아가 손을 덥석 잡고, 찐 고구마를 나누어 먹으며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육 여사는 검소했다고 증언한 이애주 전 의원은 육 여사가 1974년 흉탄에 쓰러진 8월 15일 당시 서울대병원 현직 간호사였다. “서거하신 유품을 정리하는데 글쎄 한복 속옷을 기워 입으셨더라고요. 알뜰하고 소박한 성품을 생각하며 유품 앞에서 다시 울음바다가 됐습니다."
남들이 화려한 자리라고 부러워하는 대통령 부인이지만, ‘청와대에는 항상 중류 살림을 하자’며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비싼 옷을 입는 일은 아예 없었다. 청와대는 그 흔한 꽃꽂이도 못 하게 했다. 박 대통령은 육 여사 서거 후 이렇게 회고했다.
“살아생전 자신의 사사로운 욕망을 채우기 위한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는 데..."
당시에는 다들 가난하게 산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도 사람 나름이다. 비슷한 시기에 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는 사치 행각을 벌려 명품구두만 3,000켤레가 넘었다.
육 여사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절대 권력의 부인이었지만 한복 속옷을 기워 입을 정도로 검소했고 권력 을 누린다는 원성을 살까 봐 늘 조심했다고 한다. 조용히 봉사와 선행으로 온 국민의 존경을 받았던 육영수 여사와 같은 영부인을 또 볼 수 있을까?
그녀는 사려 깊고 겸손했다. 가수 이미자 씨 레코드판 한 장을 산 것이 알려진 후 가게를 들른 적이 있었다. 한 직원이 "영부인님, 이것도 사주세요." 하고 물건을 내놓았다. 육 여사가 "근혜 엄마라고 하면 몰라도 영부인이라고 하니까 깎지도 못하겠네요."라고 말해 주위 사람들을 웃긴 적이 있다고 했다.
김두영 전 청와대 2부속실 비서관의 증언이다.
”육 여사는 권력을 즐기는 행세로 국민의 원성을 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늘 조심했다. 오만하게 보일까 봐 행사장에서 의자에 등을 기대지 않을 정도였다.“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알았다. 국가의 대소사와 인사는 대통령의 영역이라고 판단해 일절 관여하지 않았으며 대신 소소한 민원 처리는 자기 일이라고 여겼다. 매일 50여 통의 민원 편지를 뜯어보고 답장하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내 앞으로 오는 편지는 절대 손대지 마라"고 하고 민원을 직접 챙겼다.
도봉동 토굴 속에 산다는 어느 소년의 편지를 잃고는 주소도 모르는 그곳 일대를 직접 뒤졌다. 기어이 소년을 만나고는 아이스크림 장사에 필요한 장사 밑천을 대준 일도 있었다. 잡음이 나지 않도록 주변을 늘 단속했다.
청와대 야당을 자처해 대통령이 알아야 할 일은 직접 전달했다.
한번은 박 대통령 친척이 운전하다가 사망사고를 냈다. 다들 쉬쉬하고 덮으려고 했는데 육 여사가 그 소식을 대통령에게 전하는 바람에 그 친척은 구속됐다. 김종필 전 총리는 회고록에 "국민에게 퍼스트레이디란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인지 처음으로 알린 분"이라고 평가했다. 박 대통령에게 저항하던 사람들도 육 여사의 인품에는 고개를 숙였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수환 추기경은 육 여사 영결식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그분이 우리 마음에 심은 평화와 사랑의 씨가 자라 그 꽃을 피우게 해 달라."
김수환 추기경은 훗날 <김수환 추기경 이야기>에서 '국모(國母)라는 칭호를 받을만한 분‘이라고 썼다. 그 뒤 대통령 부인이 여럿이 나왔지만 육 여사만큼 국민의 존경을 받고 품격 있는 대통령 부인 역할을 잘 해낸 인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