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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구 칼럼] 선현(先賢)의 고매(高邁)한 덕성(德性)이 그립다

“국민을 빌미로 삼아 정치니 정책이니 목청을 높이지만 어느 것 하나도 헛소리로만 들린다”
 
 퇴계(退溪, 1501년-1570년)가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양성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영의정의 벼슬을 지낸 바 있는 상취헌 권철(雙翠軒 權轍, 1503-1578)이 한양에서 퇴계를 만나고자 도산서당을 찾아 내려오게 되었다. 권철은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여 충무공과 함께 만고의 명장인 권율 장군의 부친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예안까지는 5백 50리나 되는 먼 길이다. 영의정까지 지낸 사람이 먼길을 사숙(私塾)의 훈장을 몸소 찾아 나선다는 것은 그 당시의 관습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권철은 워낙 지인지감(知人之鑑)이 남달리 투철하여 불한당(不汗黨)이나 다름없었던 소년 이항복의 사람됨을 진작부터 알아보고 온 문중(門中)이 극력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혼자 우겨 사위로 삼아 명재상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을 탄생시킨 일화로 유명한데 권철은 관계(官階)를 초월하여 대학자인 퇴계를 친히 방문하기로 했던 것이다. 권철이 초헌(軺軒: 종이품 이상 벼슬아치가 타던 바퀴수레)를 타고 그 험한 길을 따라 도산서당에 도착하자 퇴계는 동구 밖까지 예의를 갖추어 영접하였다.

 그리하여 두 학자는 기쁜 마음으로 학문을 토론하였다. 끼니때가 되자 저녁상이 나왔는데 밥은 보리밥에 반찬은 콩나물국에 가지잎 무친 것과 산채뿐으로 고기붙이라고는 북어 무친 것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퇴계는 평소에도 제자들과 꼭같이 초식생활만 해 왔었는데 이날은 귀한 손님이 오셨기 때문에 산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북어를 특별히 구해다가 무쳐 올렸던 것이다.

평소에 산해진미(山海珍味)만 먹어오던 권철 대감에게는 보리밥과 소찬이 입에 맞을 리가 없었다. 그는 그 밥을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서 몇 숟가락 뜨는 척하다가 상을 물려 버리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에도 그와 똑같은 음식을 내놓았다. 권철 대감은 이날 아침에도 그 밥을 먹을 수가 없어서 어제 저녁과 마찬가지로 몇 숟갈 뜨는 척하다가 상을 물러버렸다. 퇴계가 아니라면 투정이라도 했겠지만 상대가 워낙 큰 학자라 스승처럼 존경해온 사람이고 보니 음식이 아무리 마땅치 않아도 감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권철 대감은 도산서당에 더 머물고 싶어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니 더 묵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다음날 일정을 앞당겨 부랴부랴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권철 대감은 작별하기에 앞서 퇴계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이렇게 만나고 떠나니 매우 반갑소이다. 우리가 만났던 기념으로 선생의 좋은 말을 한 말씀만 남겨 주시지요.”하니 퇴계 왈, “촌부가 대감 전에 무슨 여쭐 말씀이 있겠나이까. 모처럼 말씀하시니 제가 대감에게서 느낀 점을 한 말씀만 여쭙겠습니다.”

 퇴계는 그렇게 전제하고 옷깃을 바로 잡은 뒤에 다시 이렇게 말했다.

 “대감께서 원로에 누지(陋地)를 찾아오셨는데 제가 융숭한 식사 대접을 못 해드려서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대감 전에 올린 식사는 일반 백성들이 먹는 식사에 비기면 더할 나위 없는 성찬(盛饌)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먹는 음식은 깡 보리밥에 된장 하나가 고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감께서는 그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제대로 잡수시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저는 이 나라의 장래가 은근히 걱정되옵니다. 무릇 정치의 요체(要諦)는 여민동락(與民同樂)에 있사온데 관과 민의 생활이 그토록 동떨어져 있으면 어느 백성이 관의 정치에 심열성복(心悅誠服:믿고 따르겠느냐) 하겠나이까? 대감께서는 그 점에 각별히 유의하시기 바랄 뿐입니다.”

 그 말은 폐부(肺腑)를 찌르는 듯한 충언이었다. 퇴계가 아니고는 영의정에게 감히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직간(直諫)이었다. 권철 대감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수구렸다. 

 “참으로 선생이 아니고서는 누구에게서도 들어볼 수 없는 충고이십니다. 나는 이번 행차에 깨달은 바가 많아 집에 돌아가게 되면 선생의 말씀을 잊지 않고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 성인이 능지성인(能知聖人)이라고나 할까. 권철 대감은 크게 감명(感銘)을 받고 퇴계의 충고를 거듭 고마워하였다. 그리고 한양에 올라오자 가족들에게 퇴계의 말을 자세하게 전하고 그날로부터 퇴계를 본받아 일상생활을 지극히 검소하게 함은 물론 정사(政事)에도 역심을 다하였다. 애통(哀痛)하게도 우리의 현실은 퇴계처럼 직언을 할 분도 없고 권철 대감처럼 직언을 받아 줄자도 없다. 오직 먹잇감을 두고 투쟁하는 맹수처럼 보일 뿐. 국민을 빌미로 삼아 정치니 정책이니 목청을 높이지만 어느 것 하나도 헛소리로만 들린다. 믿을 수도 없고 하도 많이 속아보아서-

2023년 2월 14일
논설위원 정 용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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